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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증명 욕구

어렸을 때부터 내 의견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걸 자기 증명 욕구라고 부르는데 꼭 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일단 이렇게 부른다.
자기 증명 욕구를 보인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학교 수학 시간에 선생님의 풀이보다 좋은 풀이법을 알고 있으면, 손 들고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을 배려하지 않은 다소 철 없는 행동이지만, 그 때는 어린 마음에 내 말이 맞다는걸 그냥 증명하고 싶었다.
또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의미 없는 숙제는 절대 하지 않았고, 대신 엉덩이를 맞거나 수행평가를 제출하지 않았다.
수능을 보고 나서는 학교에서 추천해 준 학교와 학과에 지원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목표에 가까운 성과를 이루어냈고, 무엇보다 모든 선택과 결과에 대해 후회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 도저히 납득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음날 PPT를 만들어서 그 사람을 설득했다.
상대의 직위나 직급은 상관없이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했다.
아무 고민없이 원래 남들이 하던대로 관습처럼 하는 게 제일 싫었다.
좋은 시스템 설계나 코딩 컨벤션을 발견하면 기술 블로그를 썼고 그것도 모자라면 컨퍼런스에 나가 발표했다.
컨퍼런스에서 발표 신청을 안 받아주면 혼자 유튜브라도 켜서 떠들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면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게 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하다.

사회적 인정 욕구

누군가는 이런 감정을 사회적 인정 욕구라고 치부하지만 난 조금 다르다.
사회적 인정 욕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정 자체가 동기인 경우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보다 내 말이 맞다는 걸 결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 없다.
오히려 남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역시 내가 맞았군”하며 혼자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게 나만의 정답을 하나 더 찾는 것이고, 다양한 정답을 찾아가는 삶에서 보람을 느낀다.
이런 얘기를 가감없이 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누군가는 나를 안하무인에 함께 지내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애초에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
다행인 점은 이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메일, 블로그, 링크드인 등을 통해 다양한 연락을 받는다.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마음에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서 공유한다.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작한 행동인데 종종 감사와 격려의 말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 이런 인정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당연히 사회적 동물인지라 이따금씩 용기를 얻는다.
이 자리를 빌어 언제나 좋은 피드백을 주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한다.

창업

창업 역시도 자기 증명 욕구의 연장선이다.
회사 생활을 하며 (역시나 순전히 내 기준에) 불합리한 의사 결정과 조직 문화 등을 겪었다.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기설기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하고 이상적인 조직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왜 이렇게 밖에 못하는 것일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감히 나는 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닝-크루거 효과처럼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떠드는 당돌하고 오만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려 참을 수가 없다.

증명하고 싶은 것

이번 창업을 통해 대표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들이다.
1.
SaaS는 이제 시작이다. 어떤 사람들은 SaaS는 이미 나올만큼 나왔고, 빅테크에서 이미 다 점유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일단 SaaS는 절대 작아질 수 없는 산업이다.
인류의 발전을 지켜보면 인간은 점점 단순 노동에서 해방되고 있다.
IT 기술의 혁신으로 인간의 빈자리를 소프트웨어와 AI가 채울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인간은 인간다운 일에 더 집중할 것이다.
인건비가 점점 더 비싸지면서 인간보다 소프트웨어가 저렴해질 것이고, SaaS 구독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경제적 원리다.
여기서 전제 조건은 SaaS가 인간 노동력 이상의 값어치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프트웨어는 인간보다 쉽게 자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SaaS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도구를 디지털 세계에 옮겨 놓은 수준에 불과하다.
아직 인간을 대체할 만큼의 성과를 보여주는 SaaS는 손에 꼽는다.
AGI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진보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단순 도구 이상의 가치로 인간과 유기적으로 협업해야 한다.
2.
스타트업에게는 Python이 유리하다.
간혹 우리나라 스타트업 씬에서 Python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일단 우리나라에도 Python으로 유니콘을 만든 기업이 몇 개 존재한다.
실리콘 밸리에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에 인수 되기 전까지 Django를 이용해 1400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공동 창업자들을 포함해 엔지니어는 고작 3명 뿐이었다.
인재 채용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개발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Python 개발자 풀이 적어서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Java 개발자의 모수가 많기 때문에 좋은 개발자를 채용할 확률이 올라간다.
하지만 진짜 잘하는 Java 개발자라면 Python은 쉽게 잘할 수 있다.
물론 언어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나 이후 커리어에 대한 고민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 Python만 쓰자는 말이 아니다.
팀이 잘 성장하면 그에 맞게 기술적으로도 성장하기 때문에 충분한 기술적 성장과 도전을 보장할 수 있다.
오히려 Python을 쓰는 것이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스타트업에서는 컴퓨팅 자원을 극한으로 쓰는 것보다 인적 자원을 극한으로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기민하고 과감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팀이 작을수록 유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엔지니어도 적을 수록 유리하고, 엔지니어 한 명당 최대한 많은 생산성을 발휘해야 한다.
Python만큼 생산성이 잘 나오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대안은 Node.js 정도가 있지만 AI 관련 라이브러리들 때문에 Python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3.
기술적 해자는 아직 존재한다.
오픈 소스가 넘치고 정보가 흐르는 세상에 더 이상 기술적 해자를 구축하기 힘들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기술적 해자를 논문과 특허 그리고 딥 테크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다 알려진 기술을 쓰더라도 어떻게 쓰는 지에 따라서 실력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유튜브에 맛집 레시피는 깔려있지만, 아직도 어떤 식당은 3시간 동안 기다려서 먹고 어떤 식당은 망한다.
기술적 해자는 누가 새로운 기술을 많이 아는지 싸움이 아니다.
누가 적재적소에 필요한 기술을 잘 쓰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지에서 갈린다.
그게 바로 엔지니어링의 묘미고, 기술 활용의 실력 차이다.
다만 시스템 설계 능력과 코딩 실력은 외부에서 단기간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제품을 빠르게 만들면서도 얼마나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하는 지를 보면 된다.
기술적 해자는 반드시 존재하고 좋은 기술력은 아직도 스타트업 성장의 핵심 역량이다.